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길 가는 사람 누구를 잡고 물어보아도 자신의 조상은 양반이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족보 일 것이다. 실로 우리나라는 족보 천국이라 할 정도로 족보가 성행하고 있다. 그러나 족보는 과연 거기에 실린 사람들이 양반임을 입증해 주는 증거로 부족함이 없는 것일까?
족보란 특정 성씨의 시조부터 편찬 당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기록한 것으로 흔히 세보라고도 한다. 족보는 어느 한 개인 또는 그의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계보가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하는 씨족집단 전체 또는 그 씨족 내 파의 합동 계보 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거나 알고 있는 족보에서는 수록된 개개인에 대하여 본손인 경우 이름외에도 자(字) · 호(號) · 시호(諡號), 출생과 사망 연월일, 과거급제와 그후 관직을 중심으로 하는 이력 , 묘지의 위치 및 배우자에 관한 제사항 즉, 배우자의 출생 사망 연월일과 소속 씨족, 그의 부 조부 · 증조부의 이름과 직위 , 외조부의 성명과 본관 및 직위 등을 밝히고 있으며 사위인 경우에는 성명과 본관을 적고 있다.
오늘날 하도 여러 종류의 족보가 성행하기에 우리들은 자신의 가계 기록이라 하면 먼저 족보를 떠올린다. 하지만 과거에 가계 기록의 보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 기록보존의 수단으로 처음부터 족보라는 합동계보의 방식을 취한 것은 아니 었다. 조선 초기만해도 개별적으로 각자의 가계를 기록 보존하는 것이 족보보다 더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 이런 개별적인 가계 기록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우선 가승은 자기 부계의 직계 조상을 기록한 것으로 가장 단순한 계보 기록이다. 다음으로 내외보(內外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부계의 직계 조상과 각조상의 배우자의 부계 직계 조상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8고조도(八高祖圖) 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자기 부친의 조상을 4세대 앞인 8고조부모까지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부친뿐만 아니라 모친에 대해서도 작성해서 양친의 8고조부모까지 수록하면 자연히 16고조도(十六高祖圖) 가 된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인 가계 기록은 그 성격상 데부분 필사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족보와 같은 합동계보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계만 기록했기 때문에 인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전해진 개별적인 가계 기록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오늘날은 족보가 계보 기록의 유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설명한 여러 형식의 가계 기록가운데 가승을 제외한 다른 세 가지 , 특히 8고조도와 16고조도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쪽 혹은 할머니 쪽의 계보도 기록한 점이 특색'이다. 즉8고조도나 16고조도는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을 구별하지 않고 남녀 조상들을 모두 기록 하였던 것이다 이는모계는 무시한 채 부계 중심으로만 편찬 되어 있는 족보와는그성격이 다르다.
#남녀 차별 없이 수록했던 조선 초의 가계 기록들
유교적인 가치관의 신봉자로 자처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남녀를 평등하게 수록한 가계 기록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조선을 보통 부계 중심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지배한 사회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의 통념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조선 초의 이런 가계 기록은 족보에도 영향을 미쳐 17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족보들은 자녀를 남녀 구분없이 출생순으로 수록하거나 외손들 까지도 세대나 범위의 제한없이 수록하였던 것이다. 이 또한 조선 초기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음을 증명해 주는 분재문기(分財文記) 처럼 초기의 족보들은 남녀가 평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나아가 이는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현실과는 다름을 증언해 주고 있다.
가승, 내외보, 8고조도, 16고조도 라는 네 종류의 가계 기록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그 조상들을 기록한 문서인데 비하여, 족보는 역으로 과거의 한 인물을 공통의 조상으로 하여 자손들을 기록한 것이다.또한 각자의 가계를 족보로 취합해 합동으로 기록보존하기 시작한 것이 보통조선 초기인 15세기 중엽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에 작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 엽에 이르는 약2세기 동안에 나타나는 초기 족보들은 실상 오늘날 우리가 알고있는 족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어느 한 개인이 자기의 가승을 주축으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초기 족보에 그 편찬자의 직계 조상들에 관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기사가 실려 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름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이런 초기 족보에는 대체로 딸의 자손들, 즉 외손도 본손과 마찬가지로 세대의 제한 없이 족보 편찬 당시의 인원까지 수록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족보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성종7년(1476)명나라성화 12년-에 등장하는 인물 약8,000명 중에서 안동권씨의 남자는 380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부분 여자쪽의 자손이다. 이와 같은 편찬방식은 성화보 다음으로 오래 된 족보인 문화유씨(文化柳氏) 가정보(嘉靖譜)-명종20년(1565),명냐라가정 44년-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 기재된 총3,800명의 인물 가운데 문화 유씨는 1.400명에 지나지 않는다.
#족보가유행한 까닭
그러면 족보가 유행한 까닭은 무었인가. 족보는 출현 당시부터 단순한 가계기록의 보존수단뿐 아니라 사회적 기능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사회적 기능은 처음에는 동일 씨족원 사이의 각별한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이념적인 것이었지만 문벌숭상의 사회풍조가 발전함에 따라 점차 현실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문벌숭상 풍조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독립된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어느 씨족의 어느 파에 속하는 누구의 자손이며 또 누구의 외손인가로 이해하려는 사회관습의 소산이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사람들의 사회 · 정치 생활에서의 활동과 성공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인격보다는 그들의 가문이나 배경에 의해서 좌우되었던 조류의 반영이었다. 이런 사회풍조가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또 어느 시기부터 발달 하였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 학자들인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은 우리나라는 근세 이후로 문벌사상이 발달하여 그 폐단이 매우 심하다고 공통적으로 개탄하고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근세' 란 대체로 16~17세기 이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 시기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 아래에서 우선은 자신들을 위해서 , 둘째는 후손들을 위해서 자신들 가계의 배경을 널리 알려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인정 받기를 희망했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와 같은 희망과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 바로 족보였던 것이다. 특히 족보를 통해서 가계를 확실하게 밝혀 놓지 않을 경우 현재의 사회적 신분을 현상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현 수준 이하로 전락할 수 있는 사람들, 말하자면 양반계층의 최하단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 에게는더욱더 큰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여기에 신분제도와 관련해 운영되었던 군역문제는 경쟁적인 족보 편찬에 불을 붙였다. 조선 중종 때 확립된 군적수포제는 군역 수행을 포나 돈으로 대신하게 한 제도였는데 양반은 징수 대상에서 면제함으로써 군역 면제를 원하는 양반들이 족보를 경쟁적으로 편찬했던 것이다. 족보가 군역 면제의 한 증거로 이용된 결과 족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더 한층 커진 것은 당연했다. 이런 사정은 헌종 12년(1846)에 간행된 한산이씨(韓山李氏) 제3수보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수정족보의 편찬자 이희갑은 발문에서 자신이 3수보의 편찬 주역을 맡게 된 경위를 한산에 사는 일가 이인적 노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 노인의 족보 중간 부탁을 거부하였지만 5년간 계속해서 찾아와 부탁을 하였으며 다시 찾아올 때마다 그 말이 더욱 간곡하여 졌고 심지어는 눈물을 떨어뜨려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저 궁벽한 시골에 사는 우리 일가로서 과거나 벼슬길이 끊어진 채 여러 세대가 지나 이제 그 자손들의 이름이 군안( 군역대상자명부)에 오를 형편에 처했으나 달리 손을 쓸 방도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간청 때문에 그는 영조 16년(1740)에 만들어진 족보를 107년 지난 이때에 다시 중간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위 예에서 보듯이 당시 족보의 개수를 추진한 사람들은 절박한 필요성의 하나로 으레 군역문제를 지적하였다.
실제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탈역소지'라고 하는 탄원서를 관에 제출하여 군안에서 이름을 삭제하여 줄 것을 호소하는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탄원 정당성의 입증자료로 반드시 족보를 제시하였다. 탄원서를 접수한 관에서도 으레 족보에 나타난 가계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렸다. 유서필지(儒胥必知)는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된 일종의 서식대전(書式大典) 인데, 이 책 중에 수록된 외읍인유반맥자탈역단자(外邑人有班脈者脫役單子)에는 탄원서를 접수한 수령이 내릴 수 있는 결재문의 한 본보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족보를 검토하고 가승을 참조하니 그의 가문이 양반임이 명명백백하다. 따라서 그에 대하여 특별히 군역면제의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 이다. "
이 결재문은 조선 후기에 족보가 왜 그렇게 성행했는지를 웅변해 준다. 족보가 바로 군역면제 여부의 결정적인 입증 자료였던 것이다. 18세기부터 전개되는 족보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도래한 것이다.
#조선 후기 족보는 대부분 위조되었는가
흔히 알려진 것처럼 과연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족보는 위조되었는가. 당시 족보를 조작할 의사를 지닌 사람들은 두 집단이었을 것이다. 한 집단은조상의 관직이나 과거에 관한 기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여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려는 집단이다. 다른 한 집단은 특정한 목적 , 예를 들면 그 당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였던 군역을 면제받기 위하여 계파 자체를 전혀 엉뚱한 데에 연결시켜 이른바 아버지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바꾸는 '역부환조(易父換祖)'를 하는 원래 양반신분이 아닌 부류들이다. 그 밖의 사항들, 즉 이름이나 출생과 사망 생년월일, 묘지의 소재지 , 배우자의 소속씨족과 그 아버지의 이름 등은 혹 몰라서 잘못 기술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어도 고의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항들은 가문의 위신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경우는 '역부환조' 하는 두번째 집단이다 물론 양반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자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족보를 조작하였다면 이 역시 큰 사회적 문제가 되었겠지만 당시 문헌들은 이런 경우를 크게 다루지 않았다. 양반신분을 조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군역을 면제 받기 위해 양반신분으로 족보를 위조하는 경우이다. 과연 조선 후기에 군역면제를 받기 위한 족보위조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족보위조 사건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한다. 그 가운데 순조7년(1807)에는 위조에 관련된 죄인만도 16명이나 되며 위조 족보를 사들인 사람도 166인이나 되는 사상 최대의 족보위조 사건이 있었다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사건이지만 그 외에 18세기 후반 이후 발생하는 크고 작은 족보위조사건의 그 관련자총수는 합쳐야 5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족보위조나 위조족보를 사들이는 사람들의 목적은 군역을 면제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족보위조와 관련된 사람의 총수가5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시기 족보위조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통설이 거의 설득력을 지니지 못함을 말해 준다.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왕조가 망할 때 까지 이처럼 소규모로 이루어진 족보위조라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는 도저히 거의 모든 조선인이 족보에 등재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전인 17세기까지는 양반의 권력과 특권의 상징이었던 족보를 위조하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 말할나위가 없다.
#한국인 대다수가 족보에 기록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이 어떻게 족보에 기재될 수 있었을까? 이는 18세기 후반부터 족보편찬에 있어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던 데 기인한다 가계의 연결 관계가 불분명한 사람들을 이른바 별보(別譜) 또는 별파(別派)라는 별도의 족보에 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규장각한국본도서해제 4에 따르면 영조36년(1760) 편찬된 풍양 조씨의 족보30권 가운데 계보를 기록한 부분은 모두28책 이었다. 그중 제28책에는 17개파가 별보형식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곳에 기재된 전체 인원의 4퍼센트는 풍양조씨와의 혈연관계가 명확하게 입증되지 못한 사람들 이었다. 이들이 족보에 실리게 되었던 것은 당사자들이 풍양조씨에 속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수록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조26년(1826)년에 간행된 풍양조씨 족보는 모두35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계보를 기록한 것은 33권이다. 여기서 32권,33권은 별보로서 전체 분량의 6퍼센트이다. 그런데 1900년에 간행된 같은 가문의 족보는 80권인데, 그 가운데 계보를 수록한 것이 78권으로 그중 별보는 1권으로 줄었다. 이는 19세기까지 별보에 기재된 인물 다수가 본래의 여러 파에 흡수되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00년의 풍양 조씨 족보는 그보다 74년 전에 간행된 족보에 비하여 분량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기간 인구증가율을 20퍼센트로 추정했을 경우(Michell, Toni 연구결과에 따름) 이 기간동안 풍양조씨의 구성원은 세 배 이상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즉 족보에 수록된 인원의 최대 80~9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원이 별보에 기록되는 형식으로 풍양조씨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풍양조씨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다. 다른 가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서 족보를 지닌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러서는·그 동안 족보에서 배제 되었던 황해도 재령 이북지역과 제주를 비롯한 섬 지방의 거주자들 에게도 족보의 문호가 개방 되었다. 이런 경로를 통해 20세기 후반에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해당씨족의 족보구성원이 되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 국민 모두 가족보의 구성원이 된 본격적인 시기는 조선 후기가 아니라 20세기 전반이었다. 그것도 족보를 위조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요구에 의한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 였다. 이런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왕조의 멸망과 함께 족보가 특권을 보장하는 공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단순한 사적인 문서로 취급되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양반이라는 소수의 특권층이 배타적인 권익을 누리기 위해 족보를 만들었다면, 그런 법적인 특권이 상실된 근대 이후에는 오히려 가문구성원이 다수인 것이 세력을 확장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족보의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